-가락국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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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건국 이래 10세(世)에 걸쳐 491년간 사직(社稙)을 보존하였고 강토를 지켜왔으니 그 경계를 살펴보면 수도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황산(黃山·신라국경), 서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 남쪽으로는 남해였으니 지금의 경상남북도 일원이 가락국 영토였다.
수로왕이 서기 42년에 건국 이래 4세기 말까지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물물교역이 성행하여 민생이 안정되니 민호는 1만여호에 인구는 7만5천여명으로 증가하였다. 국토의 경계로는 동쪽은 황산강(黃山江)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서쪽은 지리산으로 백제와 경계하고, 북은 함창(咸昌) 북쪽을 경계로 신라· 백제와 접하고, 남으로는 바다에 임하여 금석병용(金石倂用)의 문화를 가진 나라로 발전하였다.
근간에 이 지역 고분에서 발굴되는 철제 무기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 역사적 배경은 첫째 낙동강 하류 비옥한 땅에 농산물이 풍부하고, 둘째 이 지역에서 철이 생산되어 무기와 농기구를 제작할 수 있었고, 셋째는 해로(海路)를 통하여 한(漢)문화를 받아들이기 쉬운 까닭이다. 그러므로 일본인의 왕래도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가락국이 신라 · 고구려 · 백제와 더불어 정립(定立)하였으므로 일부 사가(史家)에서는 이를 사국시대(四國時代)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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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고구려 · 백제는 각기 국토확장을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신라 지증왕(智證王)은 서기 506년 숙왕(肅王: 諱鉗知)때 소가야(小伽倻:固城)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락국은 국력이 쇠하여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法興王)은 정치제도를 정비하고 국력 신장에 힘써 서기 516년에 가락국 국경을 침범하였다. 이를 방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서기 521년에 숙왕이 돌아가시고 양왕(讓王:諱 仇衡)이 즉위하였다. 이 때 대가야(大伽倻:高靈)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양국 왕실간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혼인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라는 이찬(伊湌)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보내와서 혼인하게 하였다.법흥왕이 서기 524년에 밀양 영산 지역을 침공하여 병합하자, 서기 531년에는 백제가 함안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에 법흥왕은 백제가 김해 지역까지 진출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서기 532년 군대를 휘동(麾動)하여 가락국으로 진격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 양왕은 앞뒤로 신라와 백제를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 끝에 사직(社稷)의 보존도 중요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에서 백성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하여 세 왕자와 함께 법흥왕에게 나라의 주권을 의탁하였다. 법흥왕은 이를 가납(嘉納)라여 이들을 상빈(上賓)으로 우대하고, 왕자 무력(武力)으로 하여금 신주대총관(新州大摠管)에 임명하여 가락 유민들을 돌보게 하였다.
이로써 가락국은 수로왕(首露王)건국 이래 10왕에 역년 491년으로 끝을 맺었다. 혹자는 무력(武力)이 신주대초관으로서 여전히 백성을 다스렸다 하여 ‘무력왕(武力王)’이라 하고 서기 535년에 사임할 때까지를 합하여 11왕에 역년 521년이라 하기도 한다.
그 후 가락 왕족 무력(武力)의 아들 서현(舒玄)은 신라왕실 숙흘종(肅訖宗:진흥왕의 동생)의 딸 만명(萬明)과 결혼하여 유신(庾信)을 낳았고, 딸 문희(文姬)는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와 결혼하여 문무왕(文武王)을 낳았다. 그리하여 유신(庾信)은 신라의 삼국통일의 주역(主役)으로 활약하여 특별히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오르고 흥무왕(興武王)이라 시호(諡號)되었다.


